배경

2022.02.03

작년 하반기부터 이상하리만치 철학에 관계된 생각들이 머릿속에 많이 떠올랐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생각들에 대한 정답을 얻는 데 도움이될 것만 같았고, 세상을 보는 눈이 새롭게 떠지는 듯했다. 전반기의 시작 무렵인 6월 일기장에 남겼던 글귀인데 당시 어떤 생각들이 머릿속을 지나쳤는지 어렴풋이 기억나게 한다.

사소했던 것은 거대해지고
거대했던 것은 사소해진다.

이미 알던 것은 새로이 알게 되고
회색으로 남겨졌던 부분은 명암을 분명히 한다.

경계석으로 여겼던 기준들이 다시 정의되고, 기존에 현자의 지식 으로 여겨 경외했던 불가침의 영역에 대담하게 의문을 제시하고, 나의 기준으로 비판하거나 새로이 정의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다른 명사들의 촌철살인 멘트들은 그저 문학적인 아름다움 외에 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않게 되었음과 내가 걷는 길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생기어 나 밖의 영향력에 휘둘리지 않게 됨을 내포한다. 그러나 이는 무한한 오만으로 이어져 사고의 고착이라는 파멸적인 상태로 나를 끌고 갈 수 있다는 위험을 갖고 있기에 나는 나와 다른 것에 대한 우호적인 탐색 이라는 장치로 하여금 방금의 위험을 없애고자 했다. “내가 믿는 방향으로 제동 없이 쭉 나아가지만, 나와 다른 생각들에 대해 호의적인 시각으로 수용을 검토하는 것.”은 마치 외줄 타기와 같아 세심한 가중치 조작이 필요했으나 대체로 균형을 잘 잡았던 것 같다.

반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본질이란 무엇인가”, “어떤 목표로 살아야 하는가”, “각 상황에서 판단은 어떤 것을 근거로 이루어져야 하는가”, “사고의 계층구조”, “인지가 이루어지는 과정”, “진리란 무엇인가” 등과 같이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생각을 비롯해 자잘한 개념 정의, 사례 분석 등 전례 없을 방대한 양의 사고가 이루어졌으며, 특히나 어떤 것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본질들이 다른 분야의 본질과 맺는 관계, 한 분야의 본질을 다른 여러 분야로 확장되는 과정, 등에 대한 탐색 경험은 내가 그토록 원하던 분야를 초월한 진리 에 접근할 실마리가 되었다.

본질에 입각한 사고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불러왔다.

각 사례들 대해 이전과 그리고 세상이 보는 방법과 다른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는 피로함,

판단 결과들이 누군가의 명언에 범접할 수 있을 만큼 자명하고 흠이 적어서 과도하게 질서 정연하다는 지루함

그리고 고립감. 혼자 걸어가는 길, 참고할 누구도, 영향을 줄 누구도 없었다.

details 이 때 나는 믿을 수 없을만큼 감정선이 일정하고 안정적이었으며 완벽한 평안의 상태에 있었다.
슬픔도 기쁨도 어떠한 감정도 내 감정선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었다.
불혹, 지천명, 이순, 종심까지 빠르게 거치어 젊은 마음에 이상한 평안이 서렸다.
득도한줄 알았다... ㅋㅋㅋ

타이밍이 절묘하게도 이때 주변에서 많은 사건이 발생해서 머릿속에 독이 풀어졌다. 길 위에 신기루에 홀려서 원래 가던길을 잊고 원래 내가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 잊고, 끝없이 확장하던 사고만 계속되어 사고의 결과물들을 갈무리할 여력이 없는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니 상황이 점점 안 좋아졌던 것 같다. 생각을 정리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하나를 잡고 마무리를 지으니 2개의 새로운 생각이 머릿속에 들어오는 식의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2월 2일은 정말 그 정점을 찍었던 날이었는데 머릿속에서 지식이든 판단이든 인출하는 게 너무나 느려져 자폐증을 의심하는 수준이었다. 다행히도 내 머릿속을 잘 아는 친구가 킥을 주었다. 너무나 많은 선택지 앞에서 무엇을 골라야 하는지 어려운 상태로 보인다고 했다.
정답이었다. 나와 다른 것에 대한 열린 가능성에 가중치가 너무나 높아 여러 가지 선택지를 제때 죽이지 못하고 pending 상태로 두었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은 많고, 내가 좋아하는 분야도 넓다. 내가 보충해야 할 것도 많고, 내가 좋아해야 할 분야 또한 많다.
모두 내 작업 큐에 들어올 순 없다. 선택지를 줄여야 한다.
내가 모든 변수를 고려할 수는 없다. 내 능력이 그 정도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당장은 단순한 판단 기준이 필요하다.

Clearance

친구가 친절하게도 오컴의 면도날이라는 키워드를 주었다. 단순한 것이 정답이다 라는 개념을 적용하긴 어렵지만, 판단 기준을 단순하게 잡겠다.

이 전의 나로 복귀

  • AI 대학원이 도려내진다.
  • 복잡하게 헝클어진 아이디어들이 소각된다.
  • 확장되었던 철학적 사고의 확장은 중단한다.

눈을 가리던 안개를 걷어졌다.
다시 취업과 창업의 선로를 따라가는 모습이 그려지고,
그릴 수 없는 방대한 아이디어들의 씨앗들은 소각되며,
비트겐슈타인도 니체도 무덤으로 돌아간다.

소감

7개월간 긴 꿈을 꾸었다.
문화대혁명과 같은 반동의 움직임은 아니다. pending된 버퍼를 초기화하는 것이다.
생존을 위한 가지치기이며 완성되어 남겨진 유산들은 잘 보관될 것이다.

Comment

There are currently no comments on this article
Please be the first to add one below :)

Leave a Comment

내용에 대한 의견, 블로그 UI 개선, 잡담까지 모든 종류의 댓글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