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기 전에
작년 5월에 비슷한 고민을 했었다.
그때 당시엔 나름 만족스러운 답을 얻었는데 한편으로는 고민에서 도출해 낸 답이 단지 미봉책임과 이 고민을 다시 마주칠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한 달 전에 이 고민을 다시 마주했을 때 올 것이 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칼을 들고 머릿속을 헤집어야 할 시간이다.
이 글은 실존적 딜레마 극복을 위한 노력 - 4 의 후속이다.
허무
나는 과거에 “영속성을 잃은 나는 도대체 무엇을 향해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내 존재 동안 내가 향유할 수 있는 진한 존재의 경험을 위해 살겠다.”는 답변을 만들어 공허와 회의주의를 가까스로 상대해 왔다. 그렇게 공허함을 일정 받아들이고,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선택했다.
최근 궁극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 “모든 현상은 단순히 물리법칙(우리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것을 포함한)의 역사이며, 궁극의 본질은 물리법칙이다.”라는 결론을 도출했다. 섬뜩한 칼날 같은 결론이었다. 그래도 크게 와 닿지는 않았다. 점점 내가 찾은 궁극의 본질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내포하는지 알게 되면서 거대한 허무를 다시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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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지의 부재
“모든 현상은 물리적인 법칙을 철저하게 준수한다. 따라서 우주의 어떤 상태 A에 대해 다음 상태 A’는 결정되어 있다.” 자유의지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 자유의지는 착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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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적 가치(value)의 부재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것은 없다는 말과 비슷하다. 동물적인 본능에 의해 느끼는 원초적인 가치든, 사회적으로 형성되고 협의가 된 가치든 모든 객관적 가치의 근원은 인간의 주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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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의 부재
나의 존재함을 느끼는 내 의식은 신경세포들이 만들어 낸 허상의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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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경계 부재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내 육체이다. 그런데 내 뇌에 전극을 집어넣어 신경세포처럼 행동하며 신경세포에 자극을 주며 내 의식에 영향을 준다면, 그 전극을 조종하는 장치와 내 신경세포들의 합이 내가 될 것이다.
그 외에도 수많은 허무가 있다.
타협
“진실은 중요하지만, 사랑 없는 진실은 견디기 힘들다”라는 영화<두 교황>의 문장처럼 내가 찾은 “자유의지는 허상이며 결국 모두 물리법칙의 역사다.”는 결론은 견디기 힘들었다. “물리법칙의 역사”일 뿐인 세상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매트릭스에서 파란 약을 먹는 것 같았다. 그런데 더 이상 버틸 수 없다. 배부른 돼지가 되기보단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겠다는 신념을 꺾고 내 한계를 인정해야겠다.
내가 가진 장난감이 마음에 안 들지만 그렇다고 내가 뭘 할 수 있는가? 칭얼대며 울고만 있지는 않겠다.
나의 인지는 인간 육신에 종속되어 있다. 인간은 무의미한 감각적 자극에 열광한다.
나의 인간성과 그로 인한 한계를 인정하고 수용하겠다.
무가치함과 공허함의 파도는 적당히 외면하며 그때그때 추스르겠다. 내 행복을 위해.
나는 과연 이 안에서 평안을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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