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사회

혐오사회, 카롤린 엠케, 다산 초당

감상

머릿말에 담긴 많은 구절들이 심금을 울린다.

  • p17

    증오한다는 것은 확신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다른 사람을 그렇게 멸시하고 모욕하고 공격할 수 없을 것이다.

  • p25

    증오로써 증오에 맞서는 사람은 이미 자기도 따라 변하도록 허용한 셈이며 … 증오하는 자에게 부족한 것 그러니까 정확한 관찰과 엄밀한 구별과 자기회의로써 대응해야 한다.

    내 또래의 남성들 사이엔 정치와 결합한 한국의 페미니즘에 대한 혐오가 대단하다. 나 또한 지금 “페미” 라는 단어와 함께 연상되는 집단의 행태가 굉장히 유감스럽다. 그러나 페미니즘 속의 아이디얼한 부분에는 동의한다. 페미니즘의 본질엔 동의하지만, 그것을 현실에 적용하기 위해 정치가 결합되었고, 그 외에도 열듬감, 증오가 아이디어 위에 쌓여있다고 생각한다. 아이디어가 세상에 적용되기 위해 불가피하게 불순물들이 들어가는 것은 이해하지만, 배타성과 파괴성이 과하다. 그러나 아이디어는 정당하다고 생각하기에 혐오의 감정으로 이 현상들을 대해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과 맏닿은 구절이 아닐까 생각한다.

  • p 57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몇몇 이상하게 느껴지는 구절이 있고, 전체적 전개도 이상한듯하다.

    작가는 책을 통해 혐오로 점철된 현상, 혐오에 빠지는 경로와, 혐오가 쉬운 이유 등을 주장한다.
    나는 혐오하지 말아야 할 이유 => 본질을 가리고, 이성을 가려 문제 해결을 어렵게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몇몇 구절들에서 드러난 작가의 동기는 감정에 기반하고있는 듯하다. 약자에 대한 연민?

    증오를 느끼려면 우선 증오의 대상이 실존적으로 중요하며 괴물같은 존재로 여겨져야만 한다.
    동의하지 않는다. 약자에 대한 증오도 가능하다.

    이 챕터에선 독일 작센 주에서 난민을 대상으로 하는 증오 행위를 조명하고있다.
    글쓴이는 경찰이 난민에 대한 헤이트 스피치를 왜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않았는가를 묻는다.
    국가는 약자를 보호해야 하는가? 아니다. 국민을 보호해야 한다. 약자 보호는 명분이다. 명분은 도구다.
    난민을 향한 증오가 정당하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 그 집단적 증오 앞에 서서 난민을 보호해야 하는 것은 경찰이 아니다.

    난민 혐오를 왜 하지 말아야 하는가? 감정에 휘둘려 난민 문제 해결이 어렵기 때문? => 여기까진 좋다.

    그러나 작가의 혐오에 대한 비판 기저엔 난민에 대한 연민이 깔려있는듯하다. (지속적으로 여성과 어린아이가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는 주장을 한다. 남성은 증오로부터 보호받지 않아도 되는가?) 시위대도 연민이 있다. 단지 외부인인 난민은 포함되지 않는 국가와 가족에 대한 사랑과 연민이 난민에 대한 연민을 압도할 것이다.
    글쎄… 작가의 주장이 연민의 범위를 확장해야 한다는 것인가? 상대적으로 넓은 범위의 연민은 정당한가? 좁은 범위의 연민보다 정당한가?

    누구나 증오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라는 내용이 있다. 동의한다. 그러나 각자의 위치에 몰입하지 않고, 모두의 신발을 신어보라는 것은 너무 이상적이지 않은가?

책이 생각보다 감정적이다. 머릿말은 그런 색체가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작가 본인도 증오에 대한 증오를 하는 기색이 보인다. 여러가지 증오의 사건들을 묘사한다. 객관적인 척 하지만, 슬그머니 자신의 해석을 섞은 묘사다. 선동가의 모습이 보인다.

솔직히 비슷해보인다. 증오하는 측이나 증오를 증오하는 측이나 양측 다 타당한 주장을 한다. 누구의 손도 들어주고 싶지 않다.

나는 증오를 증오하는 사람을 증오하고있나? 증오의 문턱이 어디인가?

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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